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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언시] 金剛山 - 權近
옮긴이 / 노주 나웅인
작성 : 2024년 06월 11일(화) 05:00 가+가-

나웅인 / 삼성한의원 원장

金剛山
금강산

- 권근(權近, 1352 ~ 1409)

雪立亭亭千萬峯
설립정정천만봉

하얗게 우뚝 선
수많은 봉우리

海雲開出玉芙蓉
해운개출옥부용

바다 구름 펼쳐지니
옥부용 꽃이련가

神光蕩漾滄溟近
신광탕양창명근

신비한 빛 넘실넘실
넓은 바다 곁에

淑氣蜿蜒造化鍾
숙기완연조화종

맑은 기운 꿈틀꿈틀
조화를 모아 둔 듯

突兀岡巒臨鳥道
돌올강만림조도

우뚝 솟은 산봉우리
오솔길 굽어보고

淸幽洞壑秘仙蹤
청유동학비선종

맑고 그윽한 골짜기엔
신선 자취 감춰둔 듯

東遊便欲凌高頂
동유편욕릉고정

동쪽 나라 유람하여
높은 산에 올라

俯視鴻濛一盪胸
부시홍몽일탕흉

홍몽의 경치 내려보면
묵은 가슴 씻기리니

* 亭亭(정정) : 우뚝우뚝
* 蕩漾(탕양) : 넘실거리는 모습. 출렁거리는 모양.
* 蜿蜒(완연) : 뱀이나 용이 꿈틀거리는 모양.
* 鴻濛(홍몽) : 우주의 원래 모습. 천지개벽 이전의 상태.
* 應製詩(응제시) : 임금의 명에 따라 신하가 지어 올린 시.
위 詩는 권근이 당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당태종의 명을 받고 지어올린 詩.


권근(權近, 1352 ~ 1409)
여말선초의 문신. 초명은 권진(權晉). 자는 가원(可遠) 혹은 사숙(思叔).
호는 양촌(陽村) 혹은 소오자(小烏子).
명문 안동 권씨 추밀공파의 후손으로 정주학을 익혀 고려에 소개한 권부의 증손이자 검교정승 권희의 아들로 태어났다.
젊은 시절 이색과 정몽주에게서 학문을 배웠는데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고 문장에 능하였다.
경학과 문학의 양면을 잘 조화시켰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해 공민왕 때 나이 18세로 과거에 급제했다.
그런데 호명에 따라 대궐 뜰에 들어가자 왕이 노해
"저렇게 어린 아이가 어떻게 과거에 급제했느냐?"라고 묻자
이색이 "장차 크게 쓰이게 되면 어리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당시에 이숭인, 하륜 등 그 정도 나이에 급제한 사람이 드물지 않은데
18세에 어린아이라고 할 정도였으면 권근이 특별히 동안이었거나
공민왕이 그 때 유난히 기분이 안 좋았을 가능성도 있다.
실제로 권근이 키가 작았다고 하니 공민왕이 착각했을 가능성도 있기는 하다.
1389년 첨서밀직사사에 이르러 문하평리 윤승순과 함께 사신으로 명나라를 다녀왔다.
공양왕이 즉위하자 명나라에서 가져온 문서의 글이 원인이 되어 유배되었다.
그때 이성계의 구원으로 모면하고 이색의 일파와 같이 청주 옥에 갇혔다가
마침 수해로 용서를 받고 익주에 있으면서 <입학도설>을 저술했다.
외교적으로는 다른 신진사대부들처럼 친명 사대의 입장을 고수 하였지만
사전 개혁에서는 조준, 정도전 등의 사전 혁파론과 달리
이색과 함께 수조권의 중첩 폐단을 바로잡는 일전일주론의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1390년 주원장에게 이성계가 명나라를 공격한다는 거짓말을 한 윤이, 이초 등의 옥사에 연루되었으나
정몽주의 도움으로 풀려나게 되었는데 고려 말에는 스승 정몽주와 정치적 입장을 같이한 것으로 보인다.
1392년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되자
태조의 명으로 1393년에 정총과 함께 정릉의 비문을 짓고 중추원사가 되었다.
정도전이 표전문 사건을 일으키면서 골치를 썩을 때
권근이 자진해서 명나라로 가서 표전문 사건을 해결하기도 했는데
이 때 지은 것이 '응제시'이다.
이후 정도전은 권근도 견제 세력으로 보았는지 이 일 직후 권근을 탄핵하기도 했는데
태조가 "이게 무슨 짓이냐!"며 각하했다.
1398년 1차 왕자의 난 이후에는 이방원의 세력에 섰으며
이방원의 딸 경안공주와 아들인 길창군 권규의 혼인으로 둘은 사돈지간까지 되었다.
이후 정몽주의 신원에 적극적으로 나서기도 했으며
이방원이 즉위한 후에는 세자 양녕대군의 교육을 맡기도 했다.
그의 장례를 치를 때는 이 전 같은 불교식 의례가 아니라 <주자가례>에 따라 장사를 치렀다고 한다.
배진희 기자

news@presszo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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