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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言詩] 山居 - 이인로
옮긴이/ 노주(蘆洲) 나웅인
작성 : 2023년 06월 02일(금) 00:00 가+가-
山居
산거

산속 집

-이인로(李仁老, 1152 ~ 1220)


春去花猶在
춘거화유재

봄 지나도
꽃 아직 남아있고

天晴谷自陰
천청곡자음

날 맑아도
골짜기는 그늘져.

杜鵑啼白晝
두견제백주

한 낮에도
두견새 우니

始覺卜居深
시각복거심

외진 곳 사는것
문득 깨닫네.


이인로(李仁老, 1152 ~ 1220)

고려시대 예부원외랑, 비서감우간의대부 등을 역임한 관리. 문신.
본관은 경원(慶源). 초명은 득옥(得玉). 자는 미수(眉叟), 호는 와도헌(臥陶軒).
이인로는 일찍 부모를 여의고 의지할 데 없는 고아가 되었다.
화엄승통(華嚴僧統 ; 화엄종의 우두머리)인 요일(寥一)이 그를 거두어 양육하고 공부를 시켰다.
그래서 유교 전적과 제자백가서를 두루 섭렵할 수 있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시문과 글씨에 뛰어났다.
1170년 그의 나이 19세 때에 정중부(鄭仲夫)가 무신 란을 일으키고,
“문관을 쓴 자는 서리(胥吏)라도 죽여서 씨를 남기지 말라.” 하며 횡행하자,
피신하여 불문(佛門)에 귀의하였다. 그 뒤에 환속하였다.
이인로는 25세 때에 태학에 들어가 육경(六經)을 두루 학습하였다.
1180년(명종 10) 29세 때에는 진사과에 장원급제함으로써 명성이 사림에 떨쳤다.
31세 때인 1182년 금나라 하정사행(賀正使行)에 서장관(書狀官)으로 수행하였다.
다음해 귀국하여 계양군(桂陽郡) 서기로 임명되었다.
그 뒤에 문극겸(文克謙)의 천거로 한림원에 보직되어 사소(詞疏)를 담당하였다.
한림원에서 고원(誥院)에 이르기까지 14년간 그는 조칙(詔勅)을 짓는 여가에도 시사(詩詞)를 짓되 막힘이 없었다.
그래서 ‘복고(腹藁)’라는 일컬음을 들었다.
이인로는 임춘(林椿)·오세재(吳世才) 등과 어울려 시와 술로 즐기며 세칭 ‘죽림고회(竹林高會)’를 이루어 활동하였다.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郎)·비서감우간의대부(秘書監右諫議大夫)를 역임하였다.
아들 세황(世黃)의 기록에 의하면 “문장의 역량을 자부하면서도 제형(提衡 : 과거의 시관)이 되지 못한 것을 한스러워하다가 좌간의대부에 올라 시관(試官)의 명을 받았다. 그러나 시석(試席)을 열어보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그가 역임한 최후의 관직은 좌간의대부였음을 알 수 있다.
『고려사』 열전(列傳)에서 이인로에 대하여 “성미가 편벽하고 급하여 당시 사람들에게 거슬려서 크게 쓰이지 못하였다(性偏急 忤當世 不爲大用).”라고 평하였다.
그 자신은 문학 역량에 대하여 자부가 컸으나 크게 쓰이지 못하여 이상과 현실간의 거리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인로의 문학사상의 골자는 시의 본질과 그 독자적 가치에 대한 인식, 그리고 ‘어의구묘(語意俱妙 ; 말과 뜻이 함께 묘함을 갖추어야 한다)’를 강조한 작시론(作詩論)이라 하겠다.
또한 어묘를 위해서는 무부착지흔(無斧鑿之痕 ; 인위적이지 않고 자연스러움)의 자연생성의 경지를, 의묘(意妙 ; 뜻의 묘함)를 위해서는 신의(新意 ; 새로운 뜻)를 중시하였다.
이인로는 『은대집(銀臺集)』·『파한집』을 짓고 『쌍명재집』을 편찬했다고 하나, 『파한집』만이 전하고 있다.
배진희 기자

news@presszo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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